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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의 관광형태, 일제강점기 수학여행의 의미 및 목적과 현대의 수학여행과 비교

준디 2020. 11. 1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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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사>

 

1. 고려 · 조선시대의 관광형태를 비교하여 논술하시오.

 

고려시대의 관광형태는 상사의 풍, 종교행사, 체육행사 및 잡희, 등고의 풍, 관등놀이 및 선유 등 5가지이고 조선시대의 관광형태는 일시형, 체재형, 주유형의 3가지로 구분된다.

상사의 풍은 여행의 속성인 이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절과 자연경관 등의 볼거리를 통해 고차원적인 정신적 즐거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관광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고려의 종교행사 중 연등회는 불교적 행사임에 틀림없으나 왕 이하 제신들이 참여한 관계로 그 규모나 화려함이 일반인들에게는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었고, 홍왕사 · 봉은사 등의 까지 수 십리 길을 따라 여행을 하며 주변의 경치와 불교적 행사 그리고 여러 가지 잡희를 즐긴 것으로 오늘날 성지순례나 종교축제에의 참여와 비교한 수 있다. 팔관회 또한 연등회와 같이 종교적 행사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희화하여 왕실부터 서민에게까지 매우 흥미롭고 즐거운 행사가 덧붙여져 이에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것은 당시로써는 하나의 관광이 되었다.

고려시대 체육행사인 격구는 처음에는 군사훈련용으로 개발되어 나중에는 유희화하였는데, 특히 여악 잡희 음주가무 등을 관람 내지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였으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왕실의 유희에서 점차 민간의 구경거리로 변하였다. 석전도 마찬가지로 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고, 매우 신명나고 격렬한 놀이로써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도 흥미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였다고 생각된다.

 

 

등고풍은 처음에는 일종의 재앙예방으로 시작하였으나 풍속화 되면서 가까운 명산에 올라 음식을 먹고 시 가무 등을 즐기며 자연과 어울렸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관광의 차원에서 보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관광의 속성을 잘 나타내 주는 고려시대 관광여행의 한 형태라고 판단된다.

관등놀이는 석가탄신일에 등을 달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일종의 종교적 행사이다. 오래전부터 해 왔던 팔관회 및 연등회와도 관련이 있으나, 이것들과는 시기가 다르다. 선유는 오늘날의 뱃놀이나 유선으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시대를 초월한 관광유형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일시형 관광을 생활권 내에서 공무 중에 참관하거나 구경하는 형태의 관광이다.

어가나 사신행렬은 일반백성에게 있어 가장 대표적인 일시형 관광의 대상이다. 참여계층에 따라 체류형 관광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나 일반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생활권 내에서의 볼거리에 대한 구경수준이다.

국가가 주관하는 대사례나 세자의 책봉식 또는 산붕 · 나례 등과 같은 행사를 구경하는 형태인데, 행사에 따라 참여하는 주요대상이 달랐으며, 대상에 따라 일시적 또는 체류형태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서민의 경우는 구경, 즉 일시관광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연이나 의혜 참관형태의 관광은 일반적으로 여가 · 위락적 성격보다는 공무 또는 정탐을 목적으로 장기 공무여행 중 일시관광의 형태를 나타낸다.

체제형 관광은 관광을 위하여 사전에 준비를 하고 체류하며 숙박하는 관광형태로 참여계층은 선비 및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중심이다. 체제형 관광의 주요계층은 선비의 부녀자들이었다. 그래서 어가나 사신행렬 관광을 위하여 민가를 빌려 숙박하며 관광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대상으로행렬을 구경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흥과 위락적 분위기를 만들어 가며 즐겼다.

주유형 관광은 조선시대에 있어 가장 일반적인 관광의 형태로 시대에 ᄄᆞ라 행위를 표현하는 기술의 차이는 있으나 선비들에 있어 수양, 자아발견, 견문확대, 현실도피, 풍류, 이상세계 탐구 등을 목적으로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모두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참여할 수 있는 관광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하여 철저하게 계급으로 나뉘어 관광을 즐기는 부분이 다르게 나타났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이점은 고려시대는 관광의 종류가 국교인 불교행사의 종류가 많았고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교통망의 정비로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2. 일제강점기 수학여행의 의미 및 목적과 현대의 수학여행과 비교하여 논술하시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수학여행은 현대의 수학여행과 다를 바 없이 운동회 · 학예회 · 소풍 등과 함께 학교연례행사로 분류 · 운영되며, 교과교육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 주는 또 다른 차원의 교육을 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중등학교 수학여행은 단체 원거리 여행으로 학생은 물론, 학부형들의 관심도 집중되었던 학교의 행사였다. 오늘날에도 학생은 물론 학부형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조선에 근대적 학제가 형성된 이후 보통학교 학생들은 근교의 명승지를, 중등학교 이상은 보다 먼 지역의 역사 · 지리 학승을 포함하는 도시의 근대적 문명시설물과 명승지를 견학하였다. 처음에는 행군의 형태로 진행되었고, 철도의 개통으로 강화도 · 경성 · 개성 · 평양 탐사가 본격화 되었다. 중등학교 수학여행은 견문을 넓히거나 휴식을 위한 것이라는 단조로운 의미를 벗어나 고적답사 등을 통한 역사의 재인식에 목적을 두었다. 현대의 수학여행은 더욱 발전한 교통수단으로 인해 초등학교 때부터 근교의 명승지보다 더욱 더 멀리 있는 명승지나 지역에 방문하게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는 국내를 넘어 해외로 수학여행 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오늘날 수학여행은 고적답사 등을 통한 역사의 재인식 물론 포함하고 있겠지만 견문을 넓히거나 휴식을 위한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학여행은 기획이나 여행지 선정을 직접 담당하지는 않지만 수학여행 당사자는 역시 학생이다. 따라서 그 경비부담은 학생이 책임졌다. 국외 수행여행에는 30~40원 정도의 경비가 소요되었고, 매월 4월 정도의 월사금을 낼 때 20~40전 정도의 수학 여행비를 함께 내어 졸업반이 될 때까지 적립하였다. 오늘날 수학여행의 여행경비도 마찬가지로 학생이 직접 참가하기에 경비도 역시 학생들이 부담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수학여행경비를 내기 힘든 가정의 학생일지라도 지원하여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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